돝오름.

구좌읍 송당리.

늦은 오후 부터는 비가 온다길래 부랴부랴 다녀왔다. 초입에 들어서니 숲길 들길이 온갖 야생화 향기로 가득하다.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시원해진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오름이지만 가까이의 다랑쉬오름부터 멀리 용눈이, 손지, 동거문이 오름까지를 한번에 바라볼수 있는 시원시원한 곳. 이곳에 오면 아들과 비온뒤의 안개를 헤치고 다녀오던 생각이 난다.

“돈 말고 모든 것이 회사보다 좋아요. 억지로 하는 것이 없거든요. 노동 시간이 길어서 힘들 때도 있지만 그렇게 긴 노동 시간조차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죠. 일이 곧 돈이라는 생각을 버렸어요. 어쨌든 아침에 눈을 떠서 일하러 올 공간이 있고, 그 일이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만으로 지금은 만족하고 있어요.”
— 김희진, 회사가기 싫은날

닭장속에서 바깥으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시점이 정확히 언제 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꽤 오래됐었던듯. 하지만 물질적 위안을 털고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위한 결정을 내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있었다.

출근길 평소처럼 아무 생각없이 라디오를 들으며 운전을 하는데, 갑자기 앞에 닭장을 가득 실은 트럭이 끼어들었다. 시골길이라 추월도 쉽지 않은터라 짜증이 확 나려던 시점에 그 트럭에 가득 실려있던 닭들과 눈이 마주쳤다.

인간에게 고기로 선사되기전 40일을 산다던가. 그 닭들은 자신의 운명이 그리 될지 몰랐겠지. 그저 매 끼니 마다 풍족하게 주어지는 사료를 쪼으며 행복한거라 위안했겠지. 얼마안가 누군가의 살이 되기 위한 운명은 몰랐거나 애써 무시했거나.

내가 그렇게 느껴졌다. 매월 26일마다 입금되는 괜찮은 월급에, 잘도 인생을 고스란히 떠넘겨왔단 생각이 들면서 어찌나 눈물이 나고 절망스럽던지.

물론, 지금이라고 그때와 완전히 다르다고 장담은 못하겠다. 다만 적어도 그때와 5도 정도는 궤적에서 벗어났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 거리는 벌어질거라 기대하는 중.

그리고, 머지않아 한번 더 방향을 틀어야 할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좀더 다른 쪽에 가깝게 다가서 있을거라는 기대도 하고.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서른이 되면 뭐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서른이 되고 보니 서른한 살이 되는 것 외엔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 김희진, 회사가기 싫은날
“결국 ‘좋아한다’는 마음도 모자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실체 없는 그 감정을 멀리서 바라보며 그 자체에 대해 묻기보다는 실제로 해보는 것, 좋아하는지 아닌지, 일로 삼을 만큼 좋아하는지 부족한지는 써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나에게 어울리는 모자 찾기와 같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김희진, 회사가기 싫은날

카페, 혹은 작업실 아니면 뭐 비슷한

그런 공간이 필요해졌다. 집에서도 충분히 잘 해내고 있지만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 일터가 따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우선은 나만을 위한 공간이니 편안하면서도 예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는 디자이너분이 널찍한 카페 한켠에 작은 공간을 사무실로 쓰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확 움직였다. 카페 혹은 그런 공간을 갖고 싶다고.

카페라면 적어도 임대료는 낼수있어야 할테니까… 라면서 몇몇 카페를 다니다 보니 조금 정리가 된달까.

일단 작은 카페는 주인장의 컨텐츠가 확실해야 하는것 같다. 작은 공간에서 손님과 주인이 함께 호흡하는 만큼 손님에게 뭔가 아우라로 휘어잡거나, 아니면 독특함을 강하게 어필하지 못하면… 매우 불편해진다. 인테리어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건 그 공간을 채우는 전체적인 분위기의 문제.

따라서 나같은 무색무취의 사람이라면 적어도 손님과 주인이 방해받지 않을 정도의 공간은 필요할것 같다. 얼마전 다녀온 신제주의 이스탄불처럼 적당하게 나누어질 필요도 있을것 같고…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나는 카페를 하게 될것같다. 난 해보고 싶은건 거의 해보는 편이라, 아마 그럴것 같다.

“사실 언젠가부터 좋아하는 일을 해 보려고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게만 느껴집니다. 할 수 있는 방법보다 하지 못할 핑계들만 머릿속을 맴돕니다. 먹고살기 위함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좋아하는 일보다는 싫지 않은 일을 택하며 지내온 나날 속에서, 점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 김희진, 회사가기 싫은날

화창한 날씨다.
아내랑 동복리 회국수로 이른 점심을 먹는다.
배부른김에, 내친김에, 날씨핑계로, 함덕까지 간다.

가장 아름다운 함덕 바다는 서우봉 둘레길에서 볼수있다.

유채꽃이 있다.
청보리도 올라왔다.
엄마말과 아기말도 고삐없이 자유롭게 풀을 뜯는다.
그래도 덤비면 무섭겠지.

요즘

제주 온지 일년이 조금 더 지났다. 그리고 요즘 다시 이런저런 상념이 자꾸 떠오른다.

회사 짤리고 처음 제주에 왔을땐 오히려 지금 보다 더 정신없이 살았다. 여행 가느라 마무리 못한 일도 마무리 했어야 했고, 집주인의 지랄 때문에 스트레스도 심했고. 이사도 했고 다시 고정적으로 일을 하는 재택근무자가 되어 안정적(?)인 생활로 돌아가고…

다시 요즘엔 나를 향했던 그 질문이 슬슬 나를 괴롭힌다. 눈을 떠 둘러보면 세상엔 멋진 사람 대단한 사람 많은데, 어째 난 여전히 그런 사람들에게 열등감만 느끼길 반복하는 것 같다.

'나는 뭘 하면 행복한 사람인지, 나는 그나마 남보다 잘하는게 뭔지'에 대한 해답을 미룬채로 살수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느낌이다.

더 미룰수 있을까? 아니, 이 나를 향한 질문에 더 집중해서 결국엔 알아내는 방법이 뭘까.

오늘도 그저 생각만 한다.

함께 영어수업하는 분이 ‘한밤중에 용눈이오름에 가면 자연과 하나 되는 기분’이라고 하길래, 두려움을 무릎쓰고 용눈이 오름으로.

가끔은 사람들도 있었다던데, 도착해보니 주차장에 차가 한대도 없다. 근데, 나중에 든 생각이지만 누가 있었으면 훨씬 무서웠겠단 생각.

처음 오를땐 귀신이라도 만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무섬증이 슬금슬금. 근데 돌아와서 이 이야길 했더니 아들네미는 “아빠 용눈이 오름은 신들이 쉬어가는 곳이라 귀신이 없어요”라며 무심하게 드립질을. 그런줄 알았으면 너도 혼자 가보든가!!

근데 유려한 그 용눈이 오름의 능선에 올랐더니 바람이 장난 아니네. 귀신은 생각도 안나고 여길 무사히 돌아나갈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걷다가 뒷걸음질을 치게 될정도. 한마디로 제주와서 겪은 바람중 최고.

그래도 별 탈 없이 잘 왔다. 눈썹만한 달이었지만 구름속에서 나올때면 발길 닿는 곳이 환한게 고맙고 신기하고. 용눈이에서 바라보는 성산쪽 시가지는 꽤 밝더라.

다음에 또 갈수 있을까? 다시 용기가 난다면 달 밝은 날에 다랑쉬엘 가봐야 겠다.